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1 운동 (문단 편집) === [[민족대표 33인]]의 움직임 === 천도교에서는 당초 [[일본 정부]]에 조선 독립을 요청하는 건의문을 생각했지만 최린의 강력한 주장으로 독립 선언서를 만들게 되었다.[* 이 영향인지 [[기미독립선언서]]는 일본에게 기껏해야 권고하는 수준의 내용에 불과하며 독립운동을 보는 시각에 따라 이전의 과격한 독립선언서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에 따라 최남선이 초안을 잡아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2월 11일에 기초가 완성된 독립 선언서는 2월 20일부터 천도교측 인사인 이종일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를 시작하여 2월 27일까지 3만 5천여 부를 인쇄했다. 다른 한편으로 만세 시위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잡히게 되어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 33인 중 23명이 모여 회합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할 경우 자칫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여 민족 대표들은 기생[[요릿집]]인 태화관[* 현재 종로9길 태화빌딩 자리.]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 중 29명이 오후 2시 기생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 선언식을 열고 있다고 연락하게 했는데 전화를 받고 [[일본제국 경찰]] 80명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쳤다.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삼창 후 이들은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것은 기존에 알려진 내용이며 또 다시 자료를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먼저 2시쯤 태화관에 모이고 강기덕 등 학생들이 찾아와 항의했다. 학생들이 간 뒤 선언문을 배포했고 낭독은 생략하고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다. 그리고 태화관에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누군가(최린일 가능성이 높다)가 종로경찰서에 선언문을 보낸다. [[서울종로경찰서]]에서 먼저 태화관에 거기에 민족 대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는데 이에 태화관에서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지 민족 대표에게 물었고 민족 대표들은 여기에 있다고 답하라고 한 것. 그리고 태화관에서 다시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한 것이라고 한다. 즉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 비교하면 ''''낭독을 생략''''했다는 것과 ''''종로경찰서 측에서 먼저 확인을 위한 전화를 했다''''는 부분이 빠진 것이 차이점이다. [[http://dlps.nanet.go.kr/DlibViewer.do?cn=PAMP1000053063&sysid=nhn|3)선언식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4)전화는 누가, 누구에게, 왜 했는가]] 참조. 손병희가 [[이완용]][* 이는 놀라운 게 아니다. 시위 운동을 주최한 측에서는 [[송병준]] 또한 포섭하려고 했다.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도 시위를 조작하고 참여하면 일본이 행했던 악행들을 고발하는 것의 당위성을 더 부각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리 친일파와 백작 작위들을 일본에서 받은 인사들에게 포섭 작업을 했는데도 일제는 삼일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즉, 이들이 미리 사전 포섭 작업을 받고도 발설하거나 일제에 밀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말의 양심이었는지, 아니면 대세를 관망하려던 것이었는지는 그들만이 알 일이다.](...)을 직접 만나 민족 대표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매국노]]를 독립 거사에 참가시킬 수 없다는 측근이 반발에도 불구하고 손병희가 이완용을 직접 접촉하여 설득하려고 했다는데 이때 이완용이 거절하면서 "내가 2,000만 동포에게 매국적이라는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이오. 이제 새삼스러이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는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해 독립이 되면, 먼 다른 동리 사람들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 동네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외다. 손 선생의 이번 운동이 성공해 내가 그렇게 맞아 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올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 심사위원이었던 유광렬이 [[방정환]]으로부터 들었다며 증언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